[N번의 벤젠] ②해경 함정 도색 혈액암 발병자 8명 중 3명은 이미 사망

해양경찰관 박모(54)씨는 2018년 함정 도색작업을 맡은 뒤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특수 건강진단도 작업환경 측정도 없어 벤젠 노출을 입증할 길이 없었다.

특히 인사혁신처는 이를 ‘불순물’ 정도로 보고 공무상 재해를 불승인했다.

박 씨는 포기하지 않았고 약 8년 만인 2026년 1월 서울고법이 해경 최초 혈액암을 공무상 재해로 인정했다.

그러나 혈액암에 걸린 해경은 박 씨 말고 더 있다. 여전히 도색은 성분 확인 없이 이뤄지고 있다.

박 씨 홀로 증명해야 했던 시간과 바뀌지 않는 구조를 비영리 독립언론인 ‘남부저널’이 취재했고, 뉴스하다는 의미 있는 기사를 시민들과 함께 나누고자 3편에 걸쳐 싣는다.

입증책임에 막힌 1심, 7년 반 만에 뒤집은 판단

2024년 7월 19일, 서울행정법원은 해양경찰관 박 씨(54)의 청구를 기각했다. 박 씨가 함정에서 쓴 페인트와 신너에 벤젠이 얼마나 들어 있었는지, 그 벤젠에 얼마나 노출됐는지 증명하지 못했다는 이유였다. 

박 씨는 2006년 해양경찰 순경으로 임용돼 수년간 함정에서 일했다. 100톤급 소형정부터 5000톤급 대형함까지 4개 함정에서 근무하는 동안, 그는 줄곧 안전 업무를 담당했다. 박 씨는 외국인 불법어선 단속, 조난 어선 예인, 인명 구조 같은 해경 본연의 업무는 물론 함정 녹 제거와 도색이 그의 주요 업무였다.

재판 증거로 제출된 함정 정비 작업 모습. 박 씨 측 제공.

동료들은 그가 남들이 꺼리는 함정 도색 작업에 늘 앞장섰다고 증언했다. 유해 물질 노출 위험을 인지하지 못한 채 일했던 박 씨는 2018년 9월, 가슴 통증으로 찾은 병원에서 만성 골수성 백혈병(CML) 진단을 받았다. 

해경 최초로 직업성 암을 공무상 재해로 인정받기까지는 7년 반이 걸렸다. 2020년 2월 공무상 요양 신청이 불승인되자 박 씨는 이듬해 7월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1심은 입증책임에 걸려 패소했다. 항소한 끝에, 2026년 1월 28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승소 판결을 끌어냈고 같은 해 2월 판결이 최종 확정됐다.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박 씨의 실제 벤젠 노출 수치를 보여줄 자료는 양측 모두 없었다. 그럼에도 인사혁신처는 “노출은 간헐적이었다” “벤젠은 불순물 수준이었다”고 주장했고 박 씨 측은 그 논리를 하나씩 직접 뒤집어야 했다.

사무실에서 만난 이학준 변호사. 사진=박소희 기자.

박 씨 소송을 대리한 이학준 변호사는 “산재나 공무상 재해 사건에서는 노동자가 이기기 힘든 구조가 만들어진다. 이 사건도 원고 측에서 근무 당시의 유해 물질 노출 자료를 수집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번 승소는 박 씨가 전국 대학병원 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들을 찾아다니며 의학적 의견을 모아준 덕분”이라고 말했다.

박 씨는 N번째였다

항소심이 진행 중이던 2024년 11월 1일, 박 씨 측은 직접 수소문해 확보한 해경 내 혈액암 발병자 8명의 명단을 법원에 제출했다. 이들 중 3명은 이미 숨졌으며, 공무상 요양을 신청했던 2명은 모두 기각 판정을 받은 상태였다. 

인사혁신처는 이렇게 반박했다. 2025년 12월 26일 제출한 서면에서 “신청인은 3명뿐이고 모두 인정받지 못했다”며 타 직렬 대비 낮은 해경의 혈액암 인정률을 유해 환경 부재의 근거로 연결했다. 판정 기관이 판정 결과를 증거로 내민 것. 

낮은 인정률은 해경이 안전한 일터라는 의미일 수도 있지만, 보상 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는 방증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사혁신처는 인정하지 않았다. 

입증 책임은 박 씨에게

인사혁신처가 내세운 근거는 2003년 대법원 판례(2003두2755)였다. “공무와 질병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어야 하고 그 인과관계는 이를 주장하는 측에서 입증하여야 한다”는 판단이다.

당시 공무상 질병 판정기준은 백혈병을 공무상 재해로 인정하는 조건으로 “0.5피피엠(ppm) 이상 농도의 벤젠에 6개월 이상 노출”을 제시했다. 박 씨는 이 수치를 넘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야 했다.

1심 재판부는 인사혁신처의 손을 들었다. 박 씨가 쓴 제품에 벤젠이 들어 있었는지 확인할 객관적 자료가 없다는 것.

재판부가 인용한 안전보건공단의 2013년 ‘벤젠의 과거노출추정’ 연구에서 신나류의 벤젠 함량은 0.001%에서 1.66%까지 나타났지만, 최솟값으로 잡으면 기준치(0.5ppm)를 넘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했다. 

2024년 3월 동해해양경찰서가 서울행정법원에 보낸 사실조회 회신 

해경은 자료를 갖고 있지 않았다

만성골수성백혈병은 발병 시점을 특정하기 어렵다. 박 씨의 담당의(서울성모병원)는 확진일(2018년 9월 6일) 기준 6개월에서 1년 전을 발병 시기로 추정했다. 2017년 가을에서 2018년 봄 사이로, 해양경찰청이 재출범(2017년 7월)한 직후 박 씨가 3000톤급 함정에서 근무하던 때다. 

남부저널이 나라장터 조달 기록을 확인한 결과, 이 시기 해경에는 S페인트, J산업, P업체 세 곳이 페인트와 신너를 납품했다. 저독성에나멜과 에나멜신나, 저독성우레탄과 우레탄신나, 저독성비닐과 비닐신나 등이다. 

박 씨가 근무한 지방청에서 2017년 하반기 함정 정비용 페인트 인수 결과. 우레탄계 신나 25ℓ, 비닐계 신나 80ℓ 등 선박 도색용 신나·도료가 색상별로 수백 리터 단위로 배정·인수됐다. 

박 씨는 제품을 특정하지 못했다. 자신이 쓴 제품이 새로 들어온 것인지, 함정에 쌓여 있던 재고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박 씨가 처음으로 요양 신청을 했던 2018년, 인사혁신처가 적극적으로 역학조사에 나섰다면 노출 수준을 추정할 수 있었을까. 

인사혁신처가 2023년 자문을 구한 직업환경의학과 자문의는 “역학조사로 노출을 추정했다면 가능성이 높아졌을 것”이라는 취지의 의견을 냈다. 

박 씨가 제출할 수 있는 자료는 거의 없었다. 해경은 함정 정비 인력을 대상으로 특수건강진단도, 작업환경측정도 하지 않았다. 박 씨가 쓴 페인트와 신너의 물질안전보건자료(MSDS)도 남아 있지 않았다. 도색 작업을 적은 근무일지는 2015년 1년치와 2017년 6개월치뿐이었다.

해경 관계자는 “현재는 납품받을 때 MSDS를 받고 있지만 당시는 이를 요구하는 규정이 없어 실제로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조차 지금은 확인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기록이 없다는 사실은 1심에서 박 씨의 패소 사유가 됐다.

뒤집힌 논리 ① “노출은 간헐적이었다”

해경에 남아 있는 근무일지는 2015년 전체와, 2017년 6개월 치가 전부였다. 이 기록상 도색작업은 2015년 21일간 약 85시간, 2017년 6월부터 11월 9일까지 약 35시간 수행된 것으로 확인됐다.

인사혁신처는 이 수치를 “이 사건에서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사실”이라며 하루 8시간씩 매일 일하는 조선소나 자동차 공장 종사자처럼 이 병을 일으킬 수준의 유해물질에 노출된 것으로는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2심 재판부는 같은 근무일지를 다르게 읽었다. 기록이 남은 18개월 동안 120시간이면 한 달에 평균 6.67시간이다. 이를 박 씨의 함정 근무 기간 89개월 전체에 적용하면 노출 시간은 약 593.6시간이 된다. 기록이 없는 기간을 ‘노출 없음’으로 보지 않은 것이다.

함정 정비 기간에 대원들이 홋줄(배를 부두에 매어 두는 밧줄)을 감는 드럼의 청락 작업을 하고 있다. 2심 재판부는 박 씨가 7년 5개월의 함정 근무 중 약 593.6시간 청락·도색 작업을 한 것으로 추산했다. 박 씨 측 제공.

뒤집힌 논리 ② “벤젠은 불순물 수준이었다”

공무원연금공단은 대한의사협회에 의료감정을 의뢰했다. 2020년 1월 21일, 돌아온 답은 벤젠이 “만약 함유되었다고 하더라도 대부분 불순물로 들어 있는 수준”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함정 정비 작업에서 벤젠 노출 수준을 측정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국내 기준에 부합하는지는 판단하기 어렵다고 했다. 

1심 법원이 진료기록감정을 맡긴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 직업환경의학과는 ‘벤젠의 과거노출추정’ 연구를 근거로 박 씨에게 유리한 감정을 내렸다. 

이 연구에서 2010년 이후 조선업 도장 업무의 벤젠 통합노출수준은 1.04ppm, 자동차 제조업 도장은 4.2ppm이었다. 

감정의는 같은 시기 도장 작업을 한 박 씨도 1.04~4.2ppm 수준으로 노출됐을 가능성이 있다며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했다.

1심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감정의가 인용한 수치는 조사된 제품 가운데 최댓값일 뿐, 박 씨가 그런 제품을 썼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실내에서 작업하는 조선소·자동차 공장과 실외에서 작업한 박 씨를 같게 볼 수 없다는 점도 배척 이유였다. 

2심에서 대한직업환경의학회도 민간 제조업체를 대상으로 한 연구를 함정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는 의견을 냈다. 

박 씨는 직접 나섰다. 2025년 9월부터 12월까지 전국 10개 병원 직업환경의학과를 찾아다니며 소견서를 받았다. 10곳 모두 업무관련성을 인정했다. 그중 단국대 노상철 교수는 박 씨의 노출 수준을 0.01~1ppm으로 추정했다. 기준치로 알고 있던 0.5ppm을 포함한 수치였다. 

인사혁신처는 변론을 이틀 앞둔 2025년 12월 15일, 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 3명의 소견서를 한꺼번에 내며 맞섰지만 2심 재판부는 박 씨의 손을 들어줬다. 

“원고에게 불리하게 고려하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

2026년 1월 28일, 서울고등법원 제4-2행정부는 1심을 모두 뒤집었다. 재판부는 “원고가 청락 및 도색 작업에 사용한 제품의 종류와 유해물질의 함유 여부 등에 관한 자료를 해양경찰청 등에서 보유하고 있지 않아 그에 대하여 알 수 없다는 사정을 원고에게 불리하게 고려하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국가가 남기지 않은 기록의 책임을 개인에게 지울 수 없다는 뜻이다.

※ 이 기사는 비영리 독립언론 ‘남부저널’에 먼저 실렸습니다.

박소희 남부저널 기자 ya9ball@nambujournal.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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