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번의 벤젠] ③혈액암 걸린 해경 뒤통수 친 인사혁신처  벤젠 노출 기준 삭제

해양경찰관 박모(54)씨는 2018년 함정 도색작업을 맡은 뒤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특수 건강진단도 작업환경 측정도 없어 벤젠 노출을 입증할 길이 없었다.

특히 인사혁신처는 이를 ‘불순물’ 정도로 보고 공무상 재해를 불승인했다.

박 씨는 포기하지 않았고 약 8년 만인 2026년 1월 서울고법이 해경 최초 혈액암을 공무상 재해로 인정했다.

그러나 혈액암에 걸린 해경은 박 씨 말고 더 있다. 여전히 도색은 성분 확인 없이 이뤄지고 있다.

박 씨 홀로 증명해야 했던 시간과 바뀌지 않는 구조를 비영리 독립언론인 ‘남부저널’이 취재했고, 뉴스하다는 의미 있는 기사를 시민들과 함께 나누고자 3편에 걸쳐 싣는다.

입증하라던 0.5ppm, 2년 반 전 이미 사라졌다

 2025년 12월, 변론종결을 앞둔 해양경찰관 박 씨 측은 뒤늦게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됐다. 함정 도색 작업을 하다 백혈병을 얻은 박 씨에게, 인사혁신처가 소송 내내 입증하라고 요구해 온 벤젠 ‘0.5피피엠(ppm) 이상 노출’ 기준이 이미 2년 반 전에 사라져 있었다. 

인사혁신처는 2023년 6월 7일 ‘공무상 질병 판정기준(예규)’을 개정하면서 이 수치를 지웠다. 박 씨가 기준치 이상의 노출 증거를 찾아 전국 10개 병원을 돌아다니기 전이었다.

박 씨는 이겼지만, 현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대로였다. 함정에서는 지금도 자체 도장 작업이 이뤄지고 있고, 신너나 페인트에 유해물질이 들어 있는지 실물로 확인하는 절차는 여전히 없다. 

산업재해와 공무상 재해는 ‘누가’ ‘무엇으로’ 판정하느냐에 따라 누군가는 일상을 회복하고, 누군가는 치료비조차 감당하지 못한 채 포기하기도 한다. 제도를 만드는 이들의 결정이 N번째 발병자들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다는 의미다. 

인사혁신처는 이번 승소 근거 가운데 하나인 예규를 다시 손보고 있다. 지난 7월 27일 개정과 관련한 공청회를 열었지만 그 이름이 무색하게 관계기관만 불러 진행했다. 누가 박 씨를 심사했는지도 알려주지 않았다. 공정성을 해칠 위험이 있어서라고 했다. 

도크가 없어 수중정박 한 채로 뗏목에 올라 청락 작업을 하고 있는 해양경찰들. 사진=박 씨 측 제공 

상고는 포기, 판결에는 수긍 못 해

박 씨의 소송은 인사혁신처가 상고하지 않아 2월 13일 확정됐다. 박 씨를 대리한 이학준 변호사는 “보통은 상고심까지 간다”며 의아해했다.

인사혁신처 소송 담당자는 “1·2심은 사실심이지만 대법원은 법률심”이라며 “법률적 쟁점이 없어 2심 판단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법원 판례를 남기지 않으려 한 것 아니냐는 질문에는 “이미 판례가 남았고, 피할 생각이었다면 합의했을 것”이라고 일축했다. 그러나 고등법원 판결은 대법원 판례만큼 다른 재판부의 판단에 무게를 갖지 못한다.

상고는 포기했지만 판결에 수긍한 것은 아니었다. 이 담당자는 “원고 쪽에서는 자동차나 선박 공장과 비교를 했지만, 문을 닫고 일하는 대형 창고와 함정 외부의 일부 도색 작업을 동일선상에 놓기는 솔직히 납득이 많이 가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벤젠뿐 아니라 페인트 제거제의 디클로로메탄, 스프레이 도장 때 나오는 포름알데히드 등이 복합적·누적적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을 인정한 2심 재판부와 다른 시각이다. 

벤젠 노출 기준치는 이미 없었다

공무원의 공무상 재해는 일반 노동자의 산업재해와 별개 체계로 판정한다. 근거는 ‘공무원 재해보상법’과 그 하위 예규인 ‘공무상 질병 판정기준’이다. 이 예규에는 백혈병을 일으키는 벤젠의 노출 수준이 ‘0.5ppm’이라는 수치로 적혀 있었다. 이를 입증할 방도가 없던 박 씨가 동료 증언과 의사 소견을 모으러 전국을 돌아야 했던 이유다.

박 씨 측이 법원에 제출한 부산백병원 예병진 교수의 업무관련성 평가서.

인사혁신처는 2023년 6월 공상추정제 시행에 맞춰 예규 전반을 손보며 이 수치를 아예 지웠다. 공상추정제는 특정 직종·질병·재직기간 요건을 충족하면 공무원이 인과관계를 직접 입증하지 않아도 국가가 반증하지 못하는 한 공무상 재해로 인정하는 제도다. 

뒤늦게 이를 발견한 이학준 변호사는 박 씨에게 전화로 승소 가능성을 알렸다. 불리한 2심 감정 결과로 난항을 겪던 중, 인사혁신처가 존재하지 않는 ‘0.5ppm 노출’ 입증을 요구해온 허점이 포착된 것이다. 예규는 법률이나 시행령과 달리 공고 의무가 없다. 개정되면 국가법령정보센터에 올리기만 하면 된다. 

2심 재판부는 이 개정을 박 씨에게 유리하게 해석했다. 재판부는 “개정된 예규는 공무상 질병의 유형별 예시 중 10호(직업성 암) 파목에서 최근 연구 결과를 반영하였다는 등의 이유로 그 노출 수준 기준을 삭제하였으므로, 이와 같은 개정 경위와 목적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판시했다.

근거는 노동부의 민간 산재 보고서

취재를 종합하면 개정의 근거는 2021년 12월 고용노동부가 발주한 학술연구용역 보고서였다. 한양대학교 산학협력단이 수행한 ‘업무상 질병 인정기준 개선에 관한 연구 보고서’다. 고용노동부가 민간 노동자의 산재보험 체계를 고치기 위해 만든 자료다.

인사혁신처 관계자는 “해당 보고서를 근거로 개정했다”고 인정했다. 다만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를 언급하며 “자료가 날아가 2023년 개정 논의에 대한 세부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고 했다. 공무원의 근무 환경에 맞는지 따로 검토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는 뜻이다.

어선의 화재 진압도 해경 업무 중 하나다. 사진=해경 

“소방관을 위해서였다”

이 관계자는 기준 삭제 자체가 “청구에 더 유리한 측면은 있었다”면서, 화재 진압을 하는 소방공무원을 위해 삭제한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사실상 공무원 중 유해 물질 노출 현장에서 일하는 것은 소방관이 유일”한데, 출동할 때 측정기를 달고 갈 수 없는 사정을 고려했으리라는 설명이다. 직업성 암 항목만 삭제하고 같은 지침의 조혈계 질병 항목에서는 그대로 둔 것도, 직업성 암을 사실상 소방관의 문제로만 봤기 때문이다.

인사혁신처는 유해 환경 근무자를 사실상 소방관으로 한정했으나, 삭제된 기준은 전 직렬에 적용되는 조항이었다. 박 씨의 이번 승소는 “유해 현장은 소방관뿐”이라는 당국의 전제를 정면으로 뒤집은 사례다. 

그 결과 소방관이 아닌 공무원은 진단명에 따라 다른 기준을 적용받게 됐다. 조혈계 질병 항목에는 “0.5피피엠(ppm) 이상 농도의 벤젠에 노출된 후 6개월 이상 경과하여 발생한” 골수형성이상증후군, 무형성 빈혈, 골수증식성질환이 여전히 적혀 있다. 

같은 벤젠에 노출돼 병을 얻어도 백혈병이면 노출 수치를 입증하지 않아도 되고, 골수형성이상증후군이면 여전히 0.5ppm 이상 노출을 증명해야 한다.

인사혁신처는 현재 예규 개정 중

인사혁신처는 현재 판정기준을 다시 손보고 있다. 지난 3월 입찰공고를 거쳐 대한직업환경의학회가 4월부터 ‘공무상 질병 판정기준 분석 및 향후 개편방안 연구’ 용역을 수행했으며, 7월 27일 서울역 인근에서 ‘공무상 질병 판정기준 관련 공청회’를 개최한 것으로 확인됐다.

2026년 7월 16일 발송된공무상 질병 판정기준 관련 공청회 개최 안내 및 참석자 제출요청 공문

남부저널이 확보한 7월 16일 공문에 따르면 인사혁신처는 이 자리에 중앙행정기관, 광역자치단체, 시도교육청, 국회사무처, 공무원연금공단 등을 불러 의견을 들었다. 취재는 물론 청구인 박씨나 노조 등 당사자 참석이 어려운 자리였다. 

인사혁신처 관계자는 “예규를 3년마다 다시 살피도록 정한 재검토 주기에 따른 관계기간 의견수렴 절차”라면서 “어떤 내용으로 개정되는지는 잘 모른다”고 했다. 박 씨 승소의 핵심 요인이었던 벤젠 노출 기준을 되살릴지 묻는 질문에도, 재해보상제도 담당자들은 하나같이 “잘 모른다”고 답했다.

누가 판정했는지, 당사자도 모른다

공무원이 공무상 재해를 청구하면 인사혁신처에 설치된 공무원재해보상심의회가 심의해 인정 여부를 정한다. 불승인에 불복하면 공무원재해보상연금위원회에 심사를 청구할 수 있다. 여기서도 구제받지 못하면 남는 길은 행정소송뿐이다. 박 씨가 7년여를 보낸 길이다.

그러나 이 위원회들이 누구로 구성돼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남부저널은 박 씨 사건을 심사한 당시 위원 명단을 정보공개청구했다. 공무원재해보상연금위원회 사무국은 이를 비공개 처리하며 행정심판법 제41조와 같은 법 시행령 제29조를 근거로 들었다. 사무국 관계자는 “이 법에 따라 당사자에게도 공개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박 씨 측이 법원에 제출한 부산백병원 예병진 교수의 업무관련성 평가서.

이 근거는 석연치 않다. 공무원 재해보상법 제51조 제4항은 급여에 관한 결정에 대해 “’행정심판법’에 따른 행정심판을 청구할 수 없다”고 정하고 있다. 행정심판 대상조차 아닌 절차에 행정심판법의 비공개 조항을 끌어다 쓴 셈이다. 

행정심판법을 적용한다 해도, 시행령 제29조가 비공개로 정한 위원 명단은 “심리 중인 심판청구사건의 재결에 참여할 위원의 명단”이다. 이미 끝난 사건의 명단까지 감출 근거로 보기는 어렵다.

명단 비공개는 당사자의 권리도 막는다. 공무원 재해보상법 시행령 제71조 제2항은 “안건의 청구인은 위원회의 위원에게 공정한 심의·의결을 기대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기피신청을 할 수 있다”고 정한다. 그러나 이 권리는 어떤 위원이 심사에 참여하는지 알아야만 쓸 수 있다. 박 씨는 자신의 사건을 누가 심사했는지 알지 못했고, 기피를 신청할 수 있는지조차 몰랐다.

비공개 관행은 공무원 재해보상 체계만의 일이 아니다. 근로복지공단 보험 산하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도 위원 명단을 공개하지 않는다. 

2026년 9월 23일 국회에서 열린산재 상당인과관계의 규범적 판단기준 법제화를 위한 증언대회 및 전문가 토론회에서 발언하고 있는 정진주 사회연구 공동소장

서울남부업무상질병판정위원장을 지낸 정진주 사회건강연구소 공동소장은 9월 23일 국회에서 열린 산업재해보상보험법 개정 토론회에서”이제까지 판정서에는 판정을 한 위원들의 이름을 공개하지 않았다”며 “이제는 시간이 흘렀고, 규범적 판단을 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이름을 공포해 판정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해외는 명단부터 공개한다

한국 정부는 공정성을 해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위원 명단을 공개하지 않는다. 반대로 주요국은 공개를 공정성의 조건으로 삼는다.

일본에서 산재 불복 사건의 재심사를 맡는 후생노동성 산하 노동보험심사회는 위원 9명을 국회 양원의 동의를 받아 임명한다. 위원 명단과 합의체별 배치는 홈페이지에 공개된다. 심리는 당사자가 원하지 않는 한 공개가 원칙이고, 2014년부터 재결 요지를 공개하고 있다. 산재 인정기준을 고칠 때 여는 전문검토회는 발언자 이름이 적힌 회의록을 남긴다.

지방자치단체도 마찬가지다. 일본 지자체는 지방의원과 비상근 직원의 공무 재해 불복을 조례로 둔 심사회에서 따로 심사한다. 도쿄도 고다이라시, 오사카부 오사카시, 지바현은 이 심사회 위원 3명의 이름과 직업을 각각 홈페이지에 올려 두었다. 위원은 변호사, 의사, 사회보험노무사 등이다.

영국 정부 홈페이지에 게시된 산업재해자문위원회 이해관계 등록부.

영국에서 재해 인정 기준을 자문하는 산업재해자문위원회(IIAC)는 위원 14명의 이름과 소속, 임명일을 정부 포털에 게시하고, 위원별 이해관계와 분기별 회의록까지 공개한다.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산재보험항소심판원(WSIAT)도 위원의 이름과 이력을 공개한다.

이학준 변호사는 “최소한 심의위원 명단을 공개해 이들이 자신의 판단에 대해 최소한의 도의적·공적 책임을 질 수 있는 구조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함정에선 지금도 신너를 섞는다

현장의 증언은 정부의 인식과 달랐다. 박 씨의 동료 ㄱ 씨는 “페인트 희석제의 휘발성 냄새로 환각 상태가 돼 작업 중간중간 쉬어 가면서 해야 했다”고 전했다. ㄴ 씨와 ㄷ 씨도 “선박용 페인트는 독성이 강해 장시간 작업하면 어지러움과 호흡곤란을 유발한다”는 취지로 증언했다.

해경 함정에서는 지금도 자체 도장·정비 작업이 이뤄진다. 해경 관계자는 “올해 초 목포 정비창도 새로 문을 열어 사정이 나아졌고, 도장 역시 외부 용역에 맡기고 있지만 여전히 자체 정비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갑판 페인트를 칠하는 해경. 사진=박씨 측 제공 

해경이 신너를 발주할 때 쓰는 규격표에는 벤젠 기준 자체가 없다. 납품된 페인트의 성분표가 물질안전보건자료(MSDS)와 일치하는지도 서류로만 대조한다. 실물을 채취해 성분을 다시 시험하는 절차는 없다. 업체가 MSDS를 잘못 적거나 속여도 해경은 알 수 없다는 의미다.

그런 일은 실제로 일어나기도 했다. 2022년 창원대 연구팀이 시판 신너 25개를 분석한 결과, 실제 성분과 MSDS 기재 내용이 일치한 비율은 41%에 불과했다. 영세업체 제품 2종에서는 MSDS에 적혀 있지 않던 벤젠이 검출됐다.

구매도 본청이 아닌 관서별로 흩어져 있다. 유해물질 기준을 중앙에서 통합 관리하는 체계가 없고, 유해 정도를 가늠할 작업환경측정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박 씨가 만성 골수성 백혈병 진단을 받은 건 2018년 9월이다. 그사이 인사혁신처는 기준을 한 번 지웠고, 이제 다시 고치고 있다. 인삭혁신처 관계자는 무엇이 바뀔지 올해 말 알 수 있다고 했다.

박 씨가 수소문해 찾아낸 해경 내 혈액암 발병자는 박 씨 말고도 8명이었다. 해경 함정에서는 오늘도 페인트에 신너를 섞는다. 그 신너에 벤젠 등 유해물질이 얼마나 들었는지 재는 사람은 여전히 없다. 

※ 이 기사는 비영리 독립언론 ‘남부저널’에 먼저 실렸습니다.

박소희 남부저널 기자 ya9ball@nambujournal.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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